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. 그래서 일명 상초리, 서리풀이라고도 하였습니다.
서초동은 원래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와 명달리로 칭해오던 곳 이었는데 일제강점기 구역확정때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칭하게 되었고,
광복후 1963년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어 오늘에 이릅니다.
- 당산마을
- 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립니다.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 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.
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었습니다.
- 사도감마을
- 사도감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습니다.
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 밖에도 사도감개울, 사도감들,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습니다.
- 왕촌
- 반포대로와 남부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.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입니다.
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
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입니다.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,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
100여 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습니다.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습니다.
- 장안말
-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,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습니다.
세종 10년(1428) 임영대군에 봉해졌고,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. 문종 1년(1451)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,
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.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,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.
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'鄭谷(정곡)'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 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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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최종수정일 2024-02-13